처용가/처용/향가-간결한 정리와 작품 감상
처용가(處容歌) |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처용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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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밝은 달에
<현대어 해석> |
[핵심 정리]
* 연대 : 신라 헌강왕(憲康王) 재위(875 - 885)
* 갈래 : 향가(鄕歌), 8구체 향가
* 지은이 : 처용(處容)
* 표기 : 향찰(鄕札)
* 표현 : 직서적(直敍的), 제유법
* 성격 : ① 주술적(呪術的) 무가(巫歌) ② 아내를 빼앗은 역신(疫神)을 쫓은 벽사(辟邪)의 노래
* 내용 : 아내를 빼앗은 역신(疫神)에게 관용(寬容)의 정신을 베푸는 내용
* 제재 : 아내, 역신(疫神)
* 주제 : 축사(逐邪 : 사악한 귀신을 물리쳐 내쫓음)의 노래
* 구성 : 1행 - 4행 : 역신의 침범
5행 - 6행 : 처용의 물음(나무람)
7행 - 8행 : 처용의 관용(체념)
* 의의 : ① 벽사진경(辟邪進慶 :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이다.
②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로 계승되었다.
[배경설화]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
이 노래는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 처용이 그의 아내를 범하는 역신을 물리치기 위하여 부른 노래이다. 처용가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민속학적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신라 시대에도 멀리 서역과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를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는 것은 무격사회에나 있을 법한 풍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일지라도 즐겁게 해서 보낸다는 무속의 풍속과도 상통하며,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도 엿볼 수 있다.
[참고 사항]
1. 향가 원문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盻隱吾下於叱古
二盻隱誰支不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2. 역사적 관점에서의 해석
신라 말기의 역사적 현실과 처용 설화 전체 문맥을 결부시켜 해석하는 입장으로서, 처용을 중앙의 왕권에 순복(順服)하지 않는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의 개운포 출유는 지방 호족의 무마책이고, 동해 용왕의 조화는 지방 호족의 중앙 왕권에 대한 도전의 표시이며, 용의 아들 처용의 입경(入京)과 왕정 보좌는 고려(高麗)의 기인(其人) 제도(制度)와 같이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잡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중앙 귀족 자제의 타락한 모습으로 파악한다.
3. 처용탈
처용탈은 원래 잡귀(역신)를 쫓는 부적의 기능을 하는 신앙탈이지만 처용무에 사용되면서 예능적인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처용무는 궁중 나례와 연례(나라에 경사가 생겼을때 베푸는 잔치) 때 벌어졌다.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이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설화'에서 비롯되어 궁중에서 잡귀를 쫓는 나례의 중심 의식무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고관이나 왕도 이 춤을 추었으며,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잔치에서도 연행되었다고 한다. 본래 1인 또는 2인이 추던 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5인 처용무로 확대되었다.(중요 무형문화재 제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