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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자료실/한국의문인

윤선도(尹善道)의 생애와 작품세계

by 황소 걸음 2017.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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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尹善道, 1587-1671 ) 

본관 해남(海南). 자 약이(約而). 호 고산(孤山)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1612(광해군 4)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 등지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1652(효종 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복직되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복서(卜筮)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숙종 1)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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