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白石, 1912- )
생애
시인, 아동문학가. 번역가.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연(基衍)으로도 불렸다. 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1918년(7세) 오산 소학교 입학.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 동문들의 회고에 의하면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짐.
1930년(19세) 조선일보의 작품 공모에 단편 소설 [그 모(母)와 아들]을 응모, 당선하여 소설가로서 문단에 데뷔함. 이해 3월에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 선발에 뽑혀 일본으로 유학. 토오쿄오의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 사범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함.
1934년(23세) 귀국 후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함.
1924년(13세) 오산 학교 입학. 동문들의 회고에 의하면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짐.
1935년(24세) 8월31일 시 [정주성(定州城)]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이후 시작품에 더욱 정진함. <조광(朝光)>지 편집부 일을 봄.
1935년(24세) 6월의 어느날,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평생 구원의 여인으로 남을 '란(蘭)'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됨. 당시 이화고 학생이었던 통영 출신의 란은 백석의 마음을 온통 휘어잡음.
1936년(25세) 1월 20일 시집 <사슴>을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 같은 해 4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 교사로 옮겨 감. 이때의 생활 소감을 수필 [가재미, 나귀] (동아일보)에 발표함. 이 무렵,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짐. 이때 김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줌.
1937년(26세) 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함흥시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자주 나가 러시아말을 배움. 고향에서 결혼하라는 독촉을 받고 혼례식을 했으나 초례만 치른 후, 다시 함흥의 자야에게 돌아옴. 그러나 자야는 이 사실을 알고 혼자 서울로 떠남.
1938년(27세) 영생고보 축구부 지도 교사였던 백석은 전선(全鮮)고보 축구대회에 선수들을 인솔하여 참가함. 이때 자야와의 재회. 그러나 축구부 선수들의 유흥장 출입으로 말썽이 나서 지도교사였던 백석은 함흥학원측으로부터 영생여고보로 문책 전보됨. 몇 달 후 영생여고보를 사임하고 다시 서울로 와서 여성지를 편집함.
1939년(28세) 다시 두번째 결혼식을 올리나 다시 혼자서 서울로 올라옴. 이 사실을 알 게 된 자야는 다시 백석 곁을 떠남. 조선일보에 재입사하여 <여성>지의 편집을 돌보다가 다시 사임함. 고향 근처의 평안북도를 여행함. 백석은 친구 허준과 정현웅에게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만주로 향함.
1940년(29세) 만주의 신찡(新京,지금의 長春)으로 옮겨 가서 '신경시 동삼마로 시영주택 35번지'의 중국인 황씨 집에 거처를 정함.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6개월 가량 근무하다가 창씨개명 강요로 곧 사직하고, 북만주의 산간 오지를 기행함. 평론 [슬픔과 진실]을 만선일보에 발표함. 토마스 하디의 장편 소설 <테스>를 서울 조광사에서 번역 출간함. 이 출판 사업차 서울을 잠시 다녀감.
1941년(30세) 생계 유지를 위해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생활까지 하면서 고생함.
1942년(31세) 만주의 안동에서 세관 업무에 종사함. 러시아 작가 바이코프의 작품 [밀림유정] 등을 번역함.
1944년(33세)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산간 오지의 광산에 숨어서 일함.
1945년(34세) 해방과 더불어 귀국, 신의주에서 잠시 거주하다 고향 정주로 돌아와 남의 집 과수원에서 일함.
1946년(35세) 고당 조만식 선생의 요청으로 평양으로 나와 고당 선생의 통역비서로서 조선 민주당의 일을 돌봄. 고정훈의 증언에 의하면 이 해 12월 고정훈이 만주에서 귀국길에 차중에서 아들이 열병으로 죽었고, 아들의 시신을 안은 채 평양 대동강변 돌각담 집에서 살고 있던 백석을 찾아가 장례를 논의했다고 함. 당시 백석은 평양 권번 동기 출신의 여성과 동거중이었다고 함.
1947년(36세) 시 [적막강산]이 그의 벗 허준에 의해 <신천지>에 발표됨. 분단 이후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와 활동이 한국의 문학사에서 완전히 매몰됨.
1947년(36세) 10월에 열린 문학 예술 총동맹 제 4차 중앙위원회의 개편된 조직에서 외국 문학분과원에 올라 있음. 러시아 작가 씨모노프의 『낮과 밤』 을 번역하여 출판
1948년(37세) 김일성 대학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강의했다고 전해짐.
1949년(38세) 숄로호프의 소설 {고요한 돈강}을 번역 출간함. 숄로호프의 {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를 번역 출간함.
고정훈의 증언에 의하면 이화여전 출신의 아내가 있었으나 남편을 몹시 증오하여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고 함. 이때 남편에게 만약 월남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함.
1950년(39세) 국군이 평안도를 수복했을 때 주민들이 그를 정주 군수로 추대했다고 전함.
1953년(42세) 파블렌코의 {행복}을 번역 출간함.
1954년(43세) 러시아의 농민시인 이사코프스키의 시선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함.
1956년(45세) 아동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동화문학의 발전을 위하여]등의 평론을 발표함.
1956년(45세) 10월에 열린 제 2차 작가대회에서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이 되어 활발하게 일함. 이후『문학신문』을 무대로 하여 다양한 활동을 함.
1957년(46세)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발간함. 『아동문학』4월호에 「멧돼지」외 동시 3편을 발표하여 아동문학 논쟁을 촉발시킴. 「아동문학의 협소화를 반대하는 위치에서」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논쟁을 함.
1958년(47세) 8월 시평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한 단상]을 발표함. 10월 이후 부르주아 잔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위축됨.
1959년(48세) 이전까지 평양 동대원구역에 살면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창작실’에서 러시아 소설과 시 등 번역과 창작에 몰두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9년(48세) 1월 삼수군 관평리에 있는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함. 그동안 전혀 발표하지 않았던 시를 쓰기 시작함. 시 [이른 봄] 등 7편을 <조선문학>에 발표함.
1960년(49세) 이해 12월 북한의 <조선문학>지에 시 [전별] 등 2편을 발표함.
1961년(50세) 12월에 그의 마지막 시작품 [돌아온 사람] 등 3편을 <조선문학> 지에 발표함. 그 이후의 생사는 전혀 확인되지 않음. 아마도 숙청된 것으로 짐작됨.
1962년(51세) 10월 무렵 북한의 문화계 전반에 내려진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과 연관되어 일체의 창작 활동을 중단.
1963년(52세) 사망했다는 설이 있음.
1987년 첫 시집 <사슴> 이후에 발표된 시 작품 등 도합 94편을 정리한 <백석시전집>(이동순 편)이 서울의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됨. 이후 월북문인에 대한 해금조치가 단행됨. 그로부터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그의 작품이 아낌과 사랑을 받음.
1999년 백석문학상 제정 시행.
작품 경향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석 문학의 특징은 상실되어가는 고향 의식의 회복, 이를 통한 제국주의 문화의 극복, 전통 문화유산에 대한 따뜻한 긍정,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북방정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백석의 시는 우선 문체상의 개성이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매우 뚜렷하다. 그가 즐겨 쓰고 있는 방법들은 대개 회고체, 방언체, 구어체, 의고체, 연결체, 만연체, 아동 어투의 독백체 등이며, 이는 민중적 정서를 농도짙게 풍겨나게 하는 기대를 갖고서 구사된다. 시인 자신의 유소년 시절의 체험과 고향 정서로써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들이 어김없이 회고체를 채택하게 하는 것이며, 시인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지역의 방언이 그의 시작품의 방언적 토대가 되고 있다.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 영역을 농촌 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 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 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 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김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의 문학세계를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채로 소월이 먼저 요절하고 말았다. 소월의 문학에는 민요적 틀에 실어서 표현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더 짙게 마천령 서쪽 지역인 평안도 주민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백석은 분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금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매몰되어온 시인이었다. 백석의 경우는 그 자신이 무슨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꼭 북쪽의 정치체제를 선택할 만한 어떤 필연성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단지 있었다면 그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라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에 만주에서 돌아온 그가 줄곧 고향의 가족들과 기거해 왔다는 사실, 굳이 서울 쪽으로 월남해 내려와야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고향에 눌러 앉았었고, 이 때문에 남쪽의 문학사에서는 '북쪽을 선택한 시인'의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북쪽에서의 백석의 시인으로서의 생활은 항시 불안정한 것이었다. 체제 정비를 끝낸 다음 김일성이 맨먼저 착수한 것이 언어의 통일이라는 명제였다. 이것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지역간의 뿌리깊은 알력과 갈등이 사회주의 체제의 발전에 막대한 장애를 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소위 문화어 정책이라는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방언의 구획과 변별성을 일거에 무너뜨리고자 하는 시도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백석의 시세계가 지녀오던 방언주의가 제대로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백석은 실제로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의 각종 문학자료에 아주 드물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더 계속되지는 못했던 것이 바로 백석 특유의 방언주의와 그것을 가로막는 문화어 정책 간의 충돌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백석은 북에서도 비운의 시인이었지만 남에서도 마찬가지로 비운의 금지시인이었다.
대표작
여승, 고향, 여우난 골족,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국수, 동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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