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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자료실/한국의문인

천상병(千祥炳)의 생애와 작품세계_by황소걸음

by 황소 걸음 2017.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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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千祥炳 1930-1993)

 

 

1930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수학
1952년 『문예』에 시 <강물>, <갈매기>가 추천되어 등단
1952년 『현대문학』에 평론 추천
1993년 사망
<시집>『새』(1971), 『주막(酒幕)에서』(1979),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등

<작품 세계>
 우리는 지상에서의 그의 순진무구와 무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현란하거나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을 맑고 투명하게 인식하고 담백하게 제시한다. 죽음을 말하면서도 결코 허무나 슬픔에 빠지지 않고 가난을 말하면서 구차스러워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귀천이라는 시에서 보이는 그의 삶의 달관적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잠시 귀양살러온 신선과 같은 사람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의 시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 시사에서 매우 이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인이라는 세속적 명리를 떨쳐 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시를 지킨 진정한 의미의 순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설명적 서술이나 넋두리 조, 단순한 시각 그리고 동어 반복적인 요소들의 단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면에서 스케일이 크고 깊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천상병의 삶>
 맨 손바닥 하나 내보이며 다정한 친구들에게 천원, 이천원씩 술값 적선은 받았어도 늘 재벌 못지않게 여유를 갖고 호기를 부렸던 시인, 천상병. 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던 그에게도 두가지 간절한 소원은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밤이 되면 찾아들어가 눈을 붙일 방 하나요, 또하나는 사랑스런 자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종로에서 탄생한 천재 시인 이상이 명동에서 깡패들과 맞서 호통을 쳤듯 천상병도 한번은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큰 소란에 휘말릴 뻔했다. 제주도 출신의 쌍과부가 운영하는 술집 '추자네 집'에서였다. 어깨가 떡 벌어진 주먹패가 천상병에게 시비를 걸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꺼져, 이 자식아!"하고 소리쳤던 것, 그렇게 호기를 부리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천상병이 어느날 이 쌍과부집 아들 비룡이를 보고 수작을 건넸다. 마침 손님 한명 없이 어린 비룡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장면을 대하자 그는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가며 세뇌를 시켰던 것이다. "자, 내 말을 따라서 해 봐. 나의 아버지는 천상병이다. 나는 천상병씨의 아들이다." 아이스크림 맛에 홀린 이 아이가 어느정도 세뇌되어 있는 꼴을 뒤늦게 들어온 과부가 보고 질겁을 했다. 그 뒤로 아이에게 어떻게 새뇌를 했는지 다음에 천상병이 들어섰을 땐 비룡이가 그 얼굴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천상병은 X새끼다." 그렇게 X새끼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를 소망했던 그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당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끌려들어가 호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길로 그는 종로구 관철동 등 그의 주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종적이 묘연해지자 주위 친지들은 그가 추운 날 어느 길목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시인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이 힘을 모아 1971년 12월 그의 유고시집 <새>를 펴냈다. 이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자 출판사 측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죽었다던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소변도 제대로 못가려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될 만큼 폐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추운 겨울 날 그는 길거리에 쓰러져 얼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그를 보호하여 행려병자로 취급, 정신병원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어린애처럼 순수한 시인을 살리고자 하셨던 걸까. 마침 이 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감종해 박사가 천상병을 알아봤다. 문인들을 좋아하여서 두루 가깝게 사귀고 자신의 문집도 한권 펴낸 적이 있는 김박사는 천상병을 보호하여 묵묵히 치료하고 있다가 그의 유고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천상병에게 있어 수호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목순옥과의 인연은 이 병원에서 깊어졌다. 천상병의 친구 여동생이기도 했던 목순옥은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겨 죽은 사람으로까지 인정했던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통조림 몇 통을 사들고 응암동 시립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김박사는 그녀의 오빠 순복이 큰형님으로 불렀던 박종우 선생의 부산고교 제자였고 또 천상병, 목순옥과 친했던 화가 하인두의 고교동창이기도 해서 전에부터 두 사람은 친히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이때 나온 천상병의 병명은 '신경황폐증',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아 기계가 멈춰 서듯 정신마저 황폐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에게 병문안을 다니는 횟수가 늘자 천상병은 유난히 목순옥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스 목, 언제 또 올래? 팥빵이 먹고 싶다." 이렇게 의지하는 그를 내칠 수 없어 마침내 두 사람은 서울 변두리 수락산 기슭에 사글세 방을 하나 얻고 김동리 선생 주례로 72년 5월 14일 결혼식도 올렸다. 그때가 천상병은 43살의 노총각이었고, 목순옥은 36살의 노처녀였다.
< 결혼 후 남편을 대하는 내 마음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이었다. 병원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생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내 덕분에 천상병은 천원권 적선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됐으나 그런 만큼 아내의 두 어깨는 더욱더 무거웠다. 결혼 초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곁에서 돌보기 위해 병풍 자수를 집에서 놓아 번 돈으로 쌀 한말 연탄 열장씩을 사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친구 언니의 지원으로 1977년 청계천 8가에서 친구와 함께 고가구점을 경영했으나 계속되는 경영난과 비싼 이자 부담 때문에 결국 고생만 하고 문을 닫았다. 그 3년동안 쌀 한되를 살 돈이 없어 눈물을 삼킨 적도 많았으나 그들은 행복했다. 그런 때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시인 강태열이 "천 형, 막걸리 값이나 하면서 돈은 천천히 갚으라"고 선뜻 3백만원을 빌려주며 지금의 가게 '귀천'을 추천했다. 그 온정 덕분에 목순옥은 천상병의 '수호 천사'로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병, 담배 한갑이면 천하에 부러울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부칠 방까지 해결되고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 60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 걱정할 거 없네 / 그러면 어쩌지요? / 될대로 될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 그 조무래기가 무얼 알까마는 /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
 <간의 반란>이란 시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계속된 음주로 해서 간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마침내 그는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나갔다. 늦게서야 결혼했지만 22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날마다 머리를 매만져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아내 목순옥. 예쁜 여자만 보면 어린애처럼 "내 애인"이라는데도 질투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 급성 간경화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를 친구가 후원해 주는 춘천의료원에 입원시킨 뒤 춘천에서 서울로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간병에 매달렸던 그녀는 이제 천상병 기념관을 가꾸고 지키는걸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간다. 또 기일이 되면 버스를 전세내어 의정부 송산시립묘지까지 가서 추모 행사를 벌이고, 상경해서는 종로 인사동 골목의 '천상병 기념관'에서 해마다 추모 세미나도 연다.
                                                                             -종로구 문화 예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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