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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자료실/한국의문인

오장환(吳章煥)의 생애와 작품세계_by황소걸음

by 황소 걸음 2017.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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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吳章煥, 1918.5.5~1953?]

 



  시인 오장환은 1918년 충북 보은에서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삼남(서자)으로 태어났다. 안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잠시 경기도 안성에 이주하였다가 학업을 위해 상경한다. 그 후 일시적인 동경 유학시기를 제외하고는 주로 서울에서 외토리로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였다.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활약하였다. 휘문고보에서 정지용에게 사사 받았으며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대 천재, 또는 삼재(三才)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일제 강점 말기의 폭압적 상황에서도 절필하지 않으면서, 친일적인 작품활동을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군의 한 사람이 된다. 특히 신장병으로 병상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좌익 쪽의 문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이 무렵의 시 <병든 서울>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살았다
  그리고 나의 반항은 잠시 끝났다.
  아 그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내 눈
  아 그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내 씰개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씰개를 잡어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
  
  1946년 그는 이태준, 임화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후 신장 치료를 위해 소련에 가서 입원 생활을 하였으나 끝내 한쪽 신장을 떼어내고도 회복하지 못하고 1953년경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작품 경향>

그의 시 창작들은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연대순으로 시집으로 묶여서 간행되었다.
- 1기(1936∼1939) : 《성벽》 《헌사》에서 보여주는 비애와 퇴폐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지향
- 2기(1939∼1945) : 《나 사는 곳》이 드러내고 있는 향토적 삶을 배경으로 한 순수 서정시의 세계.
- 3기(1945~) : 《병든 서울》에 나타난 계급의식의 세계.
 
<주요 작품>

【시집】《성벽(城壁)》(1937.풍림사), 《헌사(獻詞)》(1939.남만서관), 《병든 서울》(1946.정음사), 《나 사는 곳》(1947.헌문사)
【시】 <목욕간>(1933.조선문학), <여수()>, <싸늘한 화단>, <구름과 눈물의 노래>, <고향 앞에서>(1940) 등
【평론】<자아(自我)의 형벌> 
 
<참고 자료>
  오장환은 휘문고문 시절 정지용을 만나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다. 휘문고보를 중퇴하고 도쿄 메이지 대학 역시 중퇴로 끝냈다. 곧바로 귀국한 그는 종로 관훈동에 '남만서점'이라는 책방을 열고 문인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1940년 7월에 쓴 <팔등잡문>에 "오늘도 명치정엘 나와 당구를 하며 콩가루 섞인 커피를 마시며 어떠면 지방 문청(文靑)이나 올라와서 어떻게 인사할 기회를 얻어 가지고 맥주나 마실까 맥주나 마실까…" 한 것을 보면, 남만서점 경영은 겨우 2년 남짓으로 끝나고 이내 전형적인 식민지의 룸펜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1942년 제국주의의 끝 무렵 서울의 궁핍화 현상이 절정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도 오장환은 술자리를 마련하는 뛰어난 재주꾼이었다. 그는 술이나 밥이 나올 데를 찾는 데는 귀신이었다. 그는 서정주·이봉구 등 신진문인들을 이끌고 문학청년을 외아들로 둔 토건업자를 찾아가는가 하면, 사설병원의 약장을 열어 알코올에다 물을 타 술 대용으로 마시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종로나 본정통이 맥주집 주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움은 물론 그곳의 웨이터들, 남자 접대부인 '오동갈보'들과도 형님 동생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맥주 한 병 값을 주고도 두세 병을 주인 몰래 마실 수 있었다. 오장환은 하는 일도 스마트해서, 서정주·이용악·이봉구와 바에라도 들어설 양이면 여급들이 떼거리로 달려와 팔과 가슴에 매달렸다. 술집 주인들도 그를 좋아해서 외상술을 즐겁게 내었다. 자연스럽게 오장환 패거리로 불릴 만큼, 한 무리 가난한 시인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오장환은 대장 노릇을 했다.
  해방 후 그는 혁명시인으로 바뀐다. 오장환은 월북 후 시작활동을 계속하다가 50년대 초엽 신장결핵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거기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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