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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자료실/현대소설자료실

광장/최인훈/현대소설-이해와 감상_by황소걸음

by 황소 걸음 2017.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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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인훈, <광장> 이해와 감상

 

 

<해설>
  이 소설은 남북 분단의 비극을 이데올로기적 측면에 서 본격적으로 다른 작품으로, 남과 북에 대한 객관적 반성이 나타나 있고 그 초월의 갈등과 상황의 비극성이 밀도 있게 표현되어 있다.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소설, 사회소설
* 배경 : 시간적 - 해방 이후 6·25 전쟁 종전 사이

            공간적 - 남북한
* 주제 : 이념 대립의 부정과 사랑을 통한 구원.
            분단 이데올로기 속의 바람직한 삶과 사회의 추구
            분단 이데올로기 속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 의미 추구
* 성격 : 관념적. 철학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전체적으로 회상 형식, 철학, 사회학 용어의 빈번한 사용.  부분적으로 의식의 흐름 수법 사용

* 출전 : <새벽>(1960)
* 구성 : 복합 구성. 분석적 구성
    발단 -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고초를 겪다가 월북
    전개 - 북쪽 사회의 부자유와 이념의 허상에 환멸을 느낌
    위기 - 인민군으로 종군하다가 포로가 됨
    절정 - 포로 석방시 제3국을 선택
    결말 - 타고르 호에서 바다로 투신

 

<줄거리>

  주인공 이명준은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그의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이형도가 당신의 이념에 따라 월북하자 그는 아버지의 친구인 변 선생의 후의로 더부살이를 한다. 대학의 철학과에 다니면서 그는 변 선생의 아들인 태식과 가까이 지내면서 현실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지내지만 현실에 대하여 깊은 환멸을 느낀다. 자기만의 밀실에 들어 앉아 현실을 관념적으로만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월북한 남로당원 아버지로 인해 명준은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게 되고,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하여 비로소 현실에 눈을 뜬 그에게 비친 남한의 현실은 타락하고, 부조리하며,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는 윤애라는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이 관념과 현실의 간격을 없애려 노력하나 실패하고 번민과 환멸 속에 인천에서 배를 얻어 타고 월북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찾아 월북한 북한도 만족한 곳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혁명가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재혼하여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북한은 혁명은 간데 없고 혁명의 자취만 있는 곳이었다. 즉, 이데올로기와 허위에 가득찬 곳이었다. 공개적인 광장만 있을 뿐, 개성적인 삶은 없는 곳이었다. 북한에서 그는 아버지의 힘으로 노동신문의 기자가 되지만 그가 작성한 기사가 당 간부들에게 핀잔을 듣자, 기자 생활을 버리고 노동판에 뛰어들어 작업한다. 그러던 중 실족으로 다리를 다치게 되고, 위문 온 무용수 은혜와 만나 새로운 사랑을 누리게 된다. 북한 사회에서 못 느끼는 삶에 대한 애착을 은혜를 통해 느끼려는 듯 명준은 은혜에게 매우 집착한다. 은혜의 모스크바 유학으로 명준은 은혜와 떨어지게 된다.
  한국 전쟁이 발생하고 인민군 정치보위부 장교가 되어 서울로 남하한 명준은 그곳에서 친구인 태식과 그의 아내가 된 옛 여인 윤애를 만나게 된다. 점령군 장교로서 그는 간첩 혐의로 잡혀온 태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 윤애를 겁탈하려고 하나, 하지 못하고 둘을 탈출시킨다. 그리고는 치열한 낙동강 전투에 배치 받아 가게 된다. 거기서 명준은 뜻밖에 간호병으로 자원 참전한 은혜를 다시 만나 동굴 속에서 재회의 기쁨을 누린다. 재회 속에 명준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명준에게 말하고 헤어져 가던 중 그녀는 전사하고 만다.
  결국 밀리는 전투 속에서 포로가 된 명준은 포로교환이 있을 때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택한다. 그가 본 두 사회는 모두 환멸만이 있으며, 보람있는 삶을 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도로 가는 배 위에서 갈매기를 은혜와 딸의 환영으로 보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만다.

 

<등장 인물>

- 이명준 : 주인공. 철학도. 전쟁 포로. 남한과 북한을 오가면서 남한의 나태와 방종·북한의 부자연스러운 이념적 구속에 환멸을 느끼고 진정한 '광장'을 찾아 중립국으로 가기로 하지만, 결국 삶의 참된 가치의 실현에 의문을 느끼고 배 위에서 바다로 투신 자살함. 
- 이형도 : 명준의 아버지. 월북한 혁명가. 이상적인 혁명가가 아닌 부정적 이미지를 보임. 남로당원으로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 관리를 하고 있지만, 명준에게 이상적 혁명가의 모습을 보이지 못함으로써 역시 회의의 대상이 됨.
- 윤애 : 남한에서의 명준의 애인. 명준의 월북 후 명준의 친구인 태식과 결혼하여 평범하게 사는 여인.
- 은혜 : 명준의 북에서의 애인. 발레리나. 북한군 간호 장교로 종군, 명준의 아이를 배고 낙동강 전투에서 폭사함. 명준의 삶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었던 여인.
- 갈매기 : 중요한 소재. 배 위에서 은혜와 그의 딸로 상징됨. 명준 자살의 동기가 됨.

 

<작품 감상>
  이 작품은 전쟁에 대해 다소 거리를 두고 전쟁과 분단의 의미를 냉정하게 점검한 것으로 남과 북을 오가면서 진실한 삶의 자리를 찾으려 노력을 기울이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역사와 민족의 문제 그리고 진정한 인간적 삶의 방향 등에 대한 문학적 모색을 보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회상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최인훈 소설의 특색인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작가는 북쪽의 사회 구조가 갖고 있는 폐쇄성과 집단 의식의 강제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방일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제3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남과 북 어느 쪽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작가는 주인공의 자살을 통해 이념 선택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음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완강하게 고정되고 있는 분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기본 구도는 간단하다. 아버지를 북에 두고 남한에서 살아가는 지식인 청년이 서 있어야 할 광장을 찾아 방황하는데, 남한에서 북한으로 다시 중립국으로 가려고 하지만 그가 도달한 곳은 죽음이었다. 결국 역사적 격동기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는 남한 사회나 북한 사회의 어느 것도 믿지 않았다. 남한 사회에 대한 명준의 비판은 고고학자 정 선생을 만나서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북한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가 그의 아버지를 만나서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라입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두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가 찾고자 한 것을 찾지 못하는 상실감의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 작품은 두 가지에서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남북 분단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본격적 인 장편이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4.19 때문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4·19에 의해 남북 분단을 정면으로 다룰 수 없다는 금기가 깨졌다는 것이다. 작자는 이명준이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고 제 3의 중립국을 택한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패배이며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조국의 현실을 벗어난 제 3의 길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지식인의 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민족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없이 남북한을 단순히 양자택일적인 것으로만 인식한 결과이다. 둘째, 이 작품이 남북한의 문제를 밀실과 광장이라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의 문제와 연결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자기의 고유의 밀실이 필요하면서, 동시에 타인과 교섭하면서 공동체적 삶을 살 광장이 필요한 법이 다. 그런데 주인공은 진정한 시민적 광장에 대한 진실한 추구보다는 자신의 관념적이고 폐쇄된 밀실에 너무 기울어져 있었다.   <'서주홍의 문학 속으로'에서>

<작가 연구>
- 아래의 성명을 누르세요.

  최인훈

 


<참고 사항>

 

 광장이 지닌 문학사적 의미
  
 전쟁은, 좌우익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남북한 사이에 서로 메울 수 없는 감정의 골을 만들고, 그것 때문에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운 극한적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극단만이 존재할 뿐이고, 그 사이의 어떠한 중간적 위치도 허용하지 않았다.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정책 방향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은 '빨갱이'로, '반동'으로 몰아부쳐 숙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인훈의 '광장'이 '밀실만 있고 광장이 없는 사회'인 남한이든, '광장만 있고 밀실이 없는 사회'인 북한이든 그 어느 쪽도 다 같이 한계를 지닌 체제임을 비판하고 포로 송환 자리에서 제3세계를 선택한 것은, 이 두 체제를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모색을 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전혀 비판을 허융하지 않는 폐쇄적 체제에 대한 탈이데올로기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소설은 남북 분단 후 금기시되어 오던 이데올로기 문제를 비로소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주홍의 문학 속으로'에서>

 상실과 되찾음의 구조

  이 소설에서 '바다'는 여성을 상징하는 원형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이명준이 바다에 빠져 자살하는 것을 '은혜와 그 아기에 대한 사랑 희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주인공은 인간중심주의적인 삶을 살다가 좌절한다. 그리고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짐으로써 사랑을 구한다. 여기서 자살은 가치있는 삶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인간성이나 정당한 삶의 조건을 상실당한 인물들이 결국은 새로운 삶을 영위해 나가는 구조를 지닌 작품을 '상실과 되찾음의 이야기 구조'라 한다. 이러한 구조는 분단 문학에 자주 등장한다.


  광장의 대립 구조
     밀실 : 광장
     남한 : 북한
     자유 : 평등
     사랑 : 이데올로기

  이 작품은 남북한의 문제를 '밀실'과 '광장'이라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의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여기서 밀실이란 자신만의 내밀한 삶의 공간이며, 광장이란 사회적 삶의 공간을 의미한다. 인간에겐 누구나 이러한 밀실과 광장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그 중 어느 하나가 제거될 때 인간은 파탄을 맞이한다. 이 작품에서 명준은 철학도로서의 밀실에서 현실적인 이유로 광장을 찾아와 월북하고 광장에서 절망을 한 후 은혜와의 밀실을 기도한다. 다시 전쟁이라는 광장을 거쳐 아무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광장 속의 밀실인 중립국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준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가 바라는 진정한 광장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선택한 제3의 중립국도 결국 현실 도피이자 삶의 포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이명준은 민족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없이 남북한을 양자택일식으로만 인식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광장을 만들어 가겠다는 적극적인 창조의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족 분단의 비극적인 희생자라고 하겠다.  

 밀실과 광장의 상징적 의미

  
광장 : 사회 중심적인 세계. 개인적 존재 가치가 침해되기도 함 
   밀실 : 자기 중심적인 세계. 타인의 간섭을 안 받는 개인적 세계

  '밀실'이란 자신만의 내밀한 삶의 공간이며, '광장'이란 사회적 삶의 공간을 의미한다.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란 이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상호 관계와 작용 속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한 사회의 역사적 조건과 상황을 주체적으로 수용해 나가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 작품에서 명준은 철학도로서의 밀실에서 현실적인 이유를 광장을 찾아 월북하고 광장에서 절망을 한 후 은혜와의 밀실을 기도한다.

 

<생각해 볼 문제>

(1) 명준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과 그 의미는?
답 : 푸른 광장, 이념의 대립이 없는 곳.

(2) 주인공의 중립국 선택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근본 이유는?
답 : 조국의 현실을 벗어난 제삼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삶은 광장과 이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명준이 광장이 없는 현실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삶과 사랑의 좌절감을 달래는 유일한 피난처는 바로 죽음인 것이다.

(3) 주인공의 중립국 선택 과정을 비판해 보자.

답 : 그는 민족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없이 단지 양자택일식으로 남한과 북한의 체제를 인식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새로운 현실을 개척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된 모습이므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4) 이 작품에서 갈매기의 상징적 의미는?
답 : 갈매기는 이명준의 의식의 투사물로 볼 수 있다. 즉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이명준의 삶의 흔적이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갈매기를 통해 그는 끝끝내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의 기억과 만난다. 결국 이명준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이 갈매기는 항해 중 내내 따라다니다가 이명준이 죽자 사라진다. 또한 은혜와 딸의 표상이기도 하다. 명준은 갈매기에서 은혜와 딸의 모습을 보고 있다.

 

<작품 부분 읽기>
  설득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 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 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사람이, 타향 만리 이국 땅에 가겠다고 나서서, 동족으로서 어찌 한마디 참고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남한 2천만 동포의 부탁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중립국."
  "당신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 버리렵니까?"
  "중립국."
  "지식인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몸을 없애 버리겠습니까? 종기가 났다고 말이지요. 당신 한 사람을 잃는 건, 무식한 사람 열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민족의 손실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를 약간 더 먹었다는 의미에서, 친구로서 충고하고 싶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재건하는 일꾼이 돼주십시오. 낯선 땅에 가서 고생하느니, 그쪽이 당신 개인으로서도 행복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인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 어떻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동생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남한에 오는 경우에,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명준은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할 것이다.
  "중립국."
  설득자는, 손에 들었던 연필 꼭지로, 테이블을 툭 치면서, 곁에 앉은 미군을 돌아볼 것이다. 미군은, 어깨를 추스르며, 눈을 찡긋 하고 웃겠지.
  나오는 문 앞에서, 서기의 책상 위에 놓인 명부에 이름을 적고 천막을 나서자, 그는 마치 재채기를 참았던 사람처럼 몸을 벌떡 뒤로 젖히면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찔끔 번지고, 침이 걸려서 캑캑거리면서도 그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
  준다고 바다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잔의 물.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상. 과학을 믿은 게 아니라 무술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잔의 영생수로 바꿔 준다는 마술사의 말을. 그들은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꼬임을. 어리석게 신비한 술잔을 찾아 나섰다가, 낌새를 차리고 항구를 돌아보자, 그들은 항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을 알고 돌아온 바다의 난파자들을 그들은 감옥에 가둘 것이다. 못된 균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의 커다란 모순과 업(業)에 비기면, 아무 자국도 못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대까지 사람이 만들어 낸 물질 생산의 수확을 고르게 나누는 것만이 모든 시대에 두루 맞는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 아닌가.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 동네가 알아낸 슬기.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비롯하는 슬픔과 기쁨을 고루 나누는 것. 그래 봐야, 사람의 조건이 아직도 풀어 나가야 할 어려움의 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은혜의 죽음을 당했을 때, 이명준 배에서는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셈이다. 이제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팔자소관으로 빨리 늙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된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 환상의 술에 취해 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 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결정한, 중립국 행이었다.
  중립국.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대도 어깨 한 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 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병원 문지기라든지, 소방서 감시원이라든지, 극장의 매표원, 그런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을 쓰는 일이 적고, 그 대신 똑같은 움직임을 하루 종일 되풀이만 하면 되는 일을 할 테다. 수위실 속에서 나는 몸의 병을 고치러 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문간을 깨끗이 치우고 아침 저녁으로 꽃밭에 물을 준다. 원장 선생이 나올 때와 돌아갈 때는 일어서서 경례를 한다. 간호부들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기꺼이 해줘야지. 신문을 사달라느니 모퉁이 과자집에서 초콜릿 한 개만 사다 달라느니 따위 귀여운 부탁을 성심껏 해준다. 그녀들은 봉급날이면 잔돈푼을 모아서 싸구려 모자나 양말 같은 조촐한 선물을 할 게다. 나는 고마워라 허리를 굽히며 받는다. 그리고 빙긋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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