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작품 개요>
1958년 '현대 문학'지 11월호에 '봄밤의 말씀', '천은사운(泉隱寺韻)' 등 다른 두 작품과 함께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아 발표된 실질적 데뷔작으로서 첫 시집 '피안 감성(彼岸感性)'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방황과 고뇌를 가라앉히고 무념 무상의 명상적 경지에 다다르는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의 이미지를 지니며, 모든 것을 너그럽게 감싸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내지 '포용'의 이미지를 지니기도 한다.
<시구 연구>
⊙ 지난 것 : 방황과 고뇌의 과거
⊙ 눈길 : 정화의 이미지를 지님, 모든 것을 덮어 무화(無化)한다는 점에서 허무와 관련
⊙ 낯선 지역 : 눈길
⊙ 눈 내리는 풍경 : 마음 속의 평화
⊙ 묵념의 가장자리 : 조용히 묵념하며 욕망 같은 것을 버리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말하는데 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위대한 적막(寂寞)'이다.
⊙ 지나온 어느 나라 : 과거의 고통과 방황
⊙ 설레이는 평화 : 원관념은 '눈'
⊙ 보이지 않는 움직임 : 역설법
⊙ 대지의 고백 : 처음으로 인식하는 세상의 새로운 모습
⊙ 눈길 : 과거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덮어주는 평화와 포용의 이미지
⊙ 처음으로 : 과거의 전 생애가 방황과 고뇌로 점철되었음을 암시
⊙ 귀를 가졌노라 : 깨달음(내면의 평화)를 통해 비로소 듣게 됨
⊙ 어둠, 위대한 적막(寂寞) : 무념무상의 평화로운 마음 상태 , 긍정적 이미지임
<핵심 정리>
* 형식 : 자유시, 서정시
* 운율 : 내재율
* 주제 : 무념 무상의 명상적 경지
* 성격 : 명상적, 관념적, 상징적
* 제재 : 눈 내리는 풍경
* 어조 : 엄숙하고 묵직한 어조(←종결형 어미 ‘-노라’의 반복)
* 출전 : <피안감성>(1960)
* 구성 : ① 방황 끝의 명상(1-4행) → 방황을 끝낸 후에 가지는 명상 - 고요함과 평화로움.
② 공(空)으로 정화된 세계의 발견(5-9행) → 처음으로 경험하는 평화의 세계.
③ 새로운 정신 세계의 열림(10-15행)→처음으로 열리는 정신의 세계
④ 정화된 외부 세계의 내면화(16-21행)→정화(淨化)된 외부 세계의 내면화 과정.
<작품 도해>
온 겨울 ---- 눈길 ---- 어둠
방황 정화 무념무상
고뇌 허무 평화
화자는 방황과 고뇌의 날들을 다 겪은 후 모든 것을 덮고 있는 눈길을 보면서 세상의 적막과 허무를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비로소 화자는 무념무상의 경지 속에서 평화를 얻고 있는 것이다.
<작품 감상>
이 시는 시인이 아직 민족과 역사와 만나기 전, 허무주의적인 세계에 탐닉하던 시절에 쓰여진 초기 작품이다. 그의 허무주의는 1950년대의 폐허를 배경으로 개인적인 방황과 연결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또한, 노장(老莊)의 무위 사상 내지는 불교의 공(空)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허무 의식은 그의 초기시의 특징을 대표한다.
이 시에 설정된 상황은 '눈'과 '어둠'이 갖는 함축 의미의 해석이 다소 문제가 될 뿐 비교적 명료하다. '나'의 마음은 어둠에 잠겨 있고 세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구도(求道)를 위해 온 겨울을 방황하고 고뇌하던 시인의 영혼은 '눈길'을 바라보면서 잠시 명상에 잠긴다.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를,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또는 포용의 이미지를 가진다. '눈 내리는 풍경'은 모든 고뇌와 고통을 덮어 버리고 '설레이는 평화'가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다. 시인은 지난날 자신을 집요하게 붙들던 현상(現象)이 소멸되고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움직임', 들리지 않던 '대지의 고백'이 비로소 들리는 체험을 한다. 이는 일상적 경험에 의한 감각이 아니라, '묵념' 속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결국, 공(空)으로 정화된 외부 세계는 내면화되어 '눈'이 세상을 덮듯, 시인의 마음을 '어둠'으로 덮는다. 실로 자아와 세계의 정서적 융합인 것이다. 여기서 '어둠'은 절망이 아니라 번민과 고뇌가 정화된 무념 무상의 경지요, 암흑이라기보다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기에 적합한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곧, 그 동안의 번민과 방황에서 벗어난 명상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시인 연구> - 아래의 성명을 누르세요.
고은
<참고 사항>
김수영의 <눈>과의 공통점
김수영 <눈>의 '눈' - 순수함을 통해 속물적인 더러움을 씻고 깨끗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고은 <눈길>의 ‘눈’ - 화자의 지나온 괴로운 과거의 길을 모두 덮어줌으로써 화자는 마음의 평화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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